지금 멍 때리고 계십니까?
뇌는 격렬하게 휴식을 취하고 싶다
“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!”
한 남자 배우가 멍한 얼굴로 “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,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”를 말하던 이 광고를 기억하십니까? 신용카드를 받으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‘공부'해야 하는 현실을 단순한 멘트와 멍한 표정만으로 재미있게 비틀어서, 광고하고자 하는 신용카드의 장점을 잘 드러낸 광고로,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.
재미도 재미이지만, 저는 이 광고에서 남자 배우의 ‘멍 때리는 표정'에 특히 눈길이 갔습니다. 혹시 <거북이 마음이다>라는 책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?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가이 클랙스턴이 쓰고, 안인희 교수가 번역한 책인데요,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‘생각하기를 멈출 때 오히려 더 지혜로워진다'는 것입니다.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인용해 성실하고 목적 지향적인 인지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게으름피우기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정신영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, 나아가 빠르고 정확한 이성을 신봉했던 서구문화가 어떻게 병이 들었으며, 느긋한 심층마음이 어떻게 이를 치유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.
[자료] https://www.aladin.co.kr/shop/wproduct.aspx?ItemId=49037114
가이 클랙스턴은, 현대인은 ‘지혜롭다와 영리하다, 스스로에 대한 ‘감각’을 갖고 있다’와 ‘그냥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다’와의 차이를 구분 못한 채, 끈기와 직관, 성찰을 지녀야만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문제에도 영리함과 집중, 생각 등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.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‘창의적이고 훌륭한 아이디어'는 떠올리지 못한다'는 거죠.
즉, 한마디로 남의 생각만을 좇지 않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려면, 멍 때리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인데요, 과연 우리는 하루 중 얼마나 멍 때리고 있을까요? 통계청이 5년마다 조사해서 발표하는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, 우리는 하루 약 10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있다, 즉 멍 때리고 있다고 합니다.
[ 하루 중 '아무것도 안 하고 쉰 시간'의 변화 ]
* 출처 : <생활시간조사>, 통계청 / 10세 이상 대상, 주행동 기준
하지만,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간은 1999년 하루평균 18분에서, 2004년 15분, 2009년 14분으로 줄어 들더니, 2014년 이후부터는 하루평균 약 11~12분 정도에 불과합니다. 가이 클랙스턴의 주장대로라면, 우리가 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‘멍 때리는 시간'이 크게 줄어든 셈이지요.
1999년 이래 ‘멍 때리는 시간'만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. 같은 조사 결과에 따르면, 같은 기간 중 ‘일하는 시간' 역시 3시간 43분에서 3시간 13분으로 30분이 줄었고, ‘학습하는 시간'도 1시간 36분에서 54분으로 40분 가량 줄었습니다. 참고로, 통계청 행동분류기준에 따르면 ‘아무것도 안 하고 쉰 시간’은 ‘문화 및 여가활동’에 포함됩니다. 멍 때리는 행위도 당당히 ‘문화 및 여가활동’ 인정되는 느낌이네요.
[ 주요 행위에 쓴 시간의 변화 ]
* 출처 : <생활시간조사>, 통계청 / 10세 이상 인구 대상, 주행동 기준 / ‘나머지’에는 문화 및 여가활동, 가정관리, 가족 및 가구원 돌보기, 자원봉사 및 무급연수, 교제 및 참여활동, 기타 활동 등이 포함됨
[ 통계청 생활시간조사의 주요행위에 쓴 시간의 변화 ]
* 출처 : <생활시간조사>, 통계청 / 10세 이상 인구 대상, 주행동 기준 / ‘그 외 행위’에는 가족 및 가구원 돌보기, 자원봉사 및 무급연수, 기타 활동 등이 포함됨
일하는 시간도, 학습하는 시간도 줄었다면, 도대체 우리 시간은 무엇이 훔쳐간 것일까요? 일단, ‘개인유지'시간이 1999년 10시간 18분에서 2019년 11시간 34분으로 크게 늘었습니다. 생활시간조사 통계설명자료에 따르면, ‘개인유지'에는 수면, 식사 및 간식, 개인건강관리, 기타개인유지 행위가 해당하는데, 이 중에서 수면시간은 7시간 47분에서 8시간 12분으로, 식사 및 간식 시간은 1시간 33분에서 1시간 55분으로 늘었습니다. 기타 개인유지 행위에는 개인위생, 외모관리, 이미용 서비스 받기 등이 포함되는데, 이 중에서 개인위생에 쓰는 시간이 39분에서 1시간 4분으로 늘었네요.
[ 통계청 생활시간조사의 주요행위에 쓴 시간의 변화 ]
* 출처 : <생활시간조사>, 통계청 / 10세 이상 인구 대상, 주행동 기준
[ 하루 중 개인유지활동에 쓴 시간의 변화 ]
* 출처 : <생활시간조사>, 통계청 / 10세 이상 인구 대상, 주행동 기준
아쉽게도 생활시간조사는 매 5년마다 실시하는 조사인 까닭에 2019년 자료가 현재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자료입니다. 그렇다면 2019년 조사 이후에 멍 때리는 시간은 줄어들었을까요?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. 2019년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, 외부활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활동은 분명 더 줄었을 것이지만, 멍 때리는 시간을 제외한 개인적 활동 시간은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.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OTT/유튜브 시청 등이 크게 늘어 났다는 점에서도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.
[기사] 코로나19 이후 미디어 시청시간 늘었다…'유튜브' 등 OTT 이용률 66.3% (메트로신문, 2021.02.02)
특히, OTT/유튜브 시청 행위는 주로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행위이고,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이상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겁니다. 따라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쉴 시간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.
코로나19가 끝나고 다시 외부 활동이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러한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요? 저희도 궁금합니다. 이것이 202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. 2025년에 202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가 공표되면 다시 한번 ‘우리가 얼마나 충분히 멍 때리고 있는지’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.
Editor Jinwoo Chung